강세경

강세경 ( Kang se kyung)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14년  가나아트부산   
2001년  조흥갤러리
1998년  석사학위청구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단체전

2016년   2인전 (리나 갤러리)
2014년   Small is beautiful (가나아트센터 부산)
                Spring Hong kong sale (Grand Hyatt hongkong)
2013년   Spring Hong kong sale (Grand Hyatt hongkong)
                Korea International Art Fair (코엑스 COEX)
                small but plenty (신세계백화점)
                대구 아트페어 (EXCO)
2012년   Spring Hong kong sale (Grand Hyatt hongkong)
                HongKong International ArtFair
                (HongKong Convention and ExhibitionCentre)
                Love is all around  (장흥아트파크 미술관)
                Healing camp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 보고전
                (가나아트센터. 장흥아트파크)
                Korea International Art Fair  (코엑스 COEX) 
                Hong Kong Hotel Art Fair (Grand Hyatt HONG KONG)
2011년   강세경,정도영 2인전 (gana art contemporary)
                Hong Kong International ArtFair
                (HongKong Convention and ExhibitionCentre)  
                작은것의미학 1호전 (Artuser Gallery)
2010년   장흥아트마켓 쨈 (장흥아트파크)  
                one point auction (서울옥션 강남점) 
                Hong kong sale (Grand Hyatt hongkong)
                Hong Kong Sale (One Pacific Place
                Conference centre. Hong Kong)

2003년   웰컴투작업실-여기서놀자 (스톤엔워터)
2002년   환경미술전 (서울시립미술관)  
1999년   바깥미술-대성리전 (대성리)
                너희가 그림값을 아느냐 (종로갤러리 서울)
1998년   ‘CORNERING'전 (덕원 미술관)
1997년   ‘거울’전 (서남 미술관)
                서울현대미술제 (서울 시립미술관)
                한강 깃발 미술전 (한강 서울)
1996년   동아 미술대전 (국립현대 미술관)
                ‘픽션들’전 (인데코 갤러리)
                ‘거울’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국립현대 미술관)
                MBC미술대전 (예술의 전당)
     
2010~ 현재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
      
      

액자 속의 일상과 ‘그’의 의지


김 영 민 (전시기획자)


1. 한 장의 사진 
  일상적인, 그래서 나른해 보이는 오후 골목길을 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 그림을 찍은 작은 사진 한 장을 작가로 부터 건네받았다. 화려한 바로크 풍의 액자를 포함한 골목길 풍경은 흑백으로 그렸고 커다란 트럭의 앞부분만, 정확하게 말하면 원근법적으로 액자를 벗어난 부분만 제 색으로 그린 그림의 사진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2010년인 것으로 보아 대학원 졸업 이후 중단되었던 작가의 화업이 다시 시작되던 무렵의 것이었고, 다시 화업을 이어가게 한 단초에 해당하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형식적으로 작가의 이전 그림과 이후의 작업을 구분하는 분기점에 해당된다. 나는 이 작은 사진을 책상머리에 스테이플러 박아 놓았다. 작가가 요사이 그리고 있는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작가도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한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해서.
  봄날 오후 세시쯤의 나른한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커다란 트럭을 보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왜 화려한 바로크식 액자의 황금색을 죄다 흑백으로 바꾸어 꼼꼼히 그려내고, 그것을 마치 흑백의 풍경의 일부로 보이게 하려고 했을까? 사진 속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 트럭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고급 자동차로 바뀐 심적 기제(mental mechanism)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흑백으로 처리되어 빛바랜 사진 같은 혹은 박제된 듯 정지해 있는 일상이란 작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등등의 생각을 책상머리에 스테이플러 ‘찍힌’ 사진을 보면서 하곤 했다. 그 사진이 작가와 작가의 작품 그리고 나를 이어주는 고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의 발로였다. 사무실이 나에겐 가장 일상적인 이유에선지, 그 사진을 스치고 지나가거나 뻔히 보면서 박제된 일상으로 보이는 그 흑백의 풍경이 그림 속에서 자동차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작가의 일상
  “운전면허는 있어?”라고 물었을 때, “있기는 한데 장롱면허에요.” 라고 작가는 대답했다. 당연히 작가는 차도 없다. 작가의 작업실은 전면 유리로 된 창문을 통해서 병풍 같은 산이 거의 전면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시골 스튜디오의 5층이다. 그녀의 작업실 밖의 산은 사계절 일품의 경치를 방안으로 끌어 들이지만 적막하기 짝이 없다. 서울 근교이긴 하나 서울을 포함해서 인근의 ‘시내’를 드나들기엔 대중교통이 턱없이 부족하고 한참을 걸어 나와야 버스정류소라도 발견할 수 있고 택시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그곳을 스튜디오로 쓰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차를 가지고 있으며 운전면허를 장롱에 처박아 두지도 않는다. 
  작가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으며, 세 마리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회색 고양이와 작업실을 나눠 쓰고 있다. 기동력이 없기도 할 뿐더러 작가는 굳이 나다녀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일 그림을 그려도 문짝만한 작품하나 하는데 거의 달포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작은 작품도 두어 점 남짓이다. 작가는 부족한 솜씨를 시간으로 메우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공예적 노동이 작업의 본령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간혹, 매끈하고 화려한 자동차가 그려진 작가의 화면과 그녀의 삶은 참으로 멀고도 멀다는 생각을 한다. 근래 들어 작가는 거의 수도승처럼 혹은 종일노동에 시달리는 초기 산업사회의 영국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노동자 같이 작업한다. 일용할 양식 같은 맥주로 피로를 푼다.  
  그녀가 그리는 화려한 자동차와 흑백의 화면, 액자로 가른 일상과 욕망의 경계에 대한 읽기를 작가가 건넨 한 장의 사진과 작가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 단면이라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상으로써의 액자 안에 갇혀 박제가 된 흑백의 배경이 가진 잠재적인 의지나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가 그림에서 숨겨놓은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3. 페티시즘(Fetishism)과 일상의 의지
  자동차는, 특히 필요 이상의 고급 자동차는 사적-배타적 소유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페티시즘을 대표한다. ‘자동차’는 그야말로 한 세기 이상 숭배되는 물신을 대표했다. 인간의 생산상의 결합이 직접적이지 않고 시장을 통해서 ‘매매’의 형태가 되면서 관계로써의 가치는 은폐되고 숭배되는 물신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동차는 물신으로써 그것을 소유한 인간의 ‘가치’를 대신한다. 그런 자동차가 그녀의 그림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흡사 인격체처럼 표정도 있으며 동세를 통해서 개성을 ‘맘껏’ 표출한다. 나는 인간을 대신하며, 나에 대한 소유가 그 사람의 가치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그 사람 자체라고. 그리고 그 뒤에는 바로크풍의 화려한 액자에 갇힌 오래된 거리풍경이 흑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와 풍경은 일종의 대구이며 상호 보완적이다. 배경은 자동차의 물신으로써의 성질을 강화하고 자동차로 인해서 배경은 일상이라는 것의 의미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상호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긴장을 통해서 서로에게 개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일상의 의지가 만들어 낸, 혹은 자동차의 물신적 가치를 더해주는 틀로써의 액자가 있다. 색 바랜 일상 위에 세워진 물신들의 세계와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풍경과 액자 그리그 그것에서 돌출해 나온 있는 자동차가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는 작가가 그려내는 화면의 본령은 흡사 미래파들의 강령을 연상할 만큼 역동적인 선명한 색의 자동차가 아니라 액자에 갇힌 흑백의 배경과 그의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흑백의 배경-우리의 일상-은 물신들에 가려져 박제처럼 퇴색해 보이지만 삶은, 최소한 화폐로 구체화 된 삶 즉 소외(alienation)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신이 된 물건이 아닌 ‘사람’의 삶은 그 배경 속에 있다. 혹여,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속에서일 것이며, 액자 밖으로 물신화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격이 우리의 일상을 복원하지 못하며, 일상의 의지는 물신인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아가, 그 자동차가 인간을 규정하고 화폐로 환산하는 ‘그 삶’에서 놓여나야 한다. 우리가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일상이라는 것은 신이 된 물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혹은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일상의 의지는 일상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삶을 유지하는 것이지 물신이 인간을 대신하게 하려는 욕망은 아니다. 그래서 물신과 일상은 지향점이 다른 대구이자 대조가 되는 것이며 거기서 그녀의 화면은 긴장감이 증폭된다. 스페인 풍의 오래된 거리의 거의 부서지다시피 한 녹슨 폐차가 말하려는 바가 물신이 대신하게 된 인간 혹은 물신숭배가 만들어 낸 페티쉬의 ‘가치 자체’는 아닐는지. 
  종종 그녀가 그린 흑백의 배경들에는 해일이 일고 오래된 고목의 뿌리들이 도로를 매우고 자동차를 위협한다. 혹은 도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 잡초들이 무성해지기도 한다. 해일과 고목의 뿌리 그리고 잡초들은 일상과 물신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잠재적으로 내제된 일상과 물신의 긴장이 표출되어 서로 좀 더 적극적인 관계 즉 맑스식으로 말하면 투쟁의 국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투쟁은 일상이 생활세계를 지키려는 의지이기도 하고 물신숭배를 위한 끝없는 욕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일상적 삶의 양면성이 드러나고, 액자에 갇혀 박제된 흑백화면의 거리는 잠재적 의지와 욕망이 내재된 양면적인 에너지의 공간이다. 당연히 색 바랜 박제처럼 보이는 것은 표층일 뿐 한 꺼풀만 벗기면 우리의 일상의 숨소리가 들리는 궁상맞지만 역동적인 공간이다. 혹은 정리되지 않은 서랍이나 무의식의 장(場)과 닮아있다. 나는 그녀의 작품에서 이것이 주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4. 구원, 삶을 낭비하지 않는 것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이 내 생각과 더불어 남겨지겠지요.
그 남겨진 것이 삶을 낭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작업실에 처박혀 매일 그림만 그리는 것을 평생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되돌아온 대답이다.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게 있는 말투였다. 나는 늘 젊은 작가들을 보면, 그들이 평생 화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매우 부정적인 의문부호이다. 평생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화업은 때때로 숭고한 일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세월 즉 이력에서 공란으로 처리된 세월을 낭비라고 말했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보냈던 기간 동안 작가는 자신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화업을 이어가고 있는 동문들로부터 ‘진하게’ 받았단다. 그리고 그것이 뼈저렸던 모양이다. 동문들의 전시에 ‘객’으로 갈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단다. 그것이 공백의 의미라면 의미이다. 지금 초기 자본주의 영국의 공장노동자처럼 단순한 생활과 화업이 행복하게 된 계기를 긴 공백이 제공한 듯싶다. 긴 공백이 화업을 되찾아 주었다면 이력상의 공백은 작가에겐 복이라면 복이다. 최소한 앞으로 더 많은 시간 화업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복이다. 예술의지라는 말이 그야말로 색 바랜 어휘처럼 들리는 근자에 들어서는 더욱 복이다. 세월은 길고 화업을 지속할 수 있는 최고의 동력은 그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일에 대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부샹파이(Buixian Phai 1920-1988)라는 베트남 작가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죽어가는 자신을 그림으로 남겼다.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뜬금없이 베트남의 근대 대가의 병상에서 죽으면서 그린 크로키 몇 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림을 그려 먹고사는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야 말로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유훈(遺訓)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